병원에서 퇴원한 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순간.
비로소 편안함을 느낄 줄 알았지만, 몸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또 한 번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딸은 함께 있지 못하는 미안함을 준비로 대신했고,
남편과 아들은 새로 시작된 간병의 일상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족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밥 한 숟가락, 약 한 알을 잘 넘기는 것뿐이었습니다.
1. 딸의 준비, 떨어져 있어도 닿는 마음
퇴원한다고 전해주었을 때, 딸아이는 서울에서 내려오진 못했지만
그 대신 제가 집에서 불편하지 않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두었어요.
소변주머니를 걸어둘 수 있는 뽈대, 체온계와 혈압계,
암환자 전용 치약과 샴푸, 옆으로 기대 쉴 수 있도록 등받이까지…
그 작은 것 하나하나에서
“엄마, 함께 있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딸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함께 있지 못하는 미안함을
딸은 조용히, 세심한 준비로 전해주었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또 미안했습니다.
2. 집이지만 낯선 일상, 익숙해지는 시간
병원에서는 침대에 누워 지냈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바닥에 앉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습니다.
양쪽 신장에 연결된 소변줄 때문에
소파조차도 낮아서 앉기가 어렵고, 오래 앉아 있을 힘도 없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답답할까 봐 거실 한쪽 창가로 침대를 옮겨주었어요.
햇살이 드는 그 자리, 창밖을 바라보며 누워 있으면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하지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남편과 아들의 간병은 계속됐습니다.
소변주머니는 여전히 30분마다 비워줘야 했고,
남편은 매일 ‘몸에 좋다’는 보양식을 사다 날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겨우 밥 한 숟가락을 말아 삼키는 정도였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애쓰는 가족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3. 내가 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침대 옆엔 약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암 진통제, 해열제, 구토제, 절임 방지약까지 종류도 많고, 시간도 복잡했습니다.
빈속에 먹으면 안 되는 약도 있었기에,
남편과 아들은 항상 제 식사를 먼저 챙긴 뒤에야 본인들 식사를 했습니다.
아들은 이틀에 한 번씩
신장에 연결된 관 주변을 꼼꼼하게 소독해 주었고,
남편은 밥, 빨래, 청소는 물론, 목욕까지 도맡아 주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저는 조용히 결심했습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밥을 잘 먹는 것. 약을 잘 챙겨 먹는 것.”
지금은 그게 가족에게 드릴 수 있는 제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마무리하며
몸은 점점 더 낯설어졌지만,
사랑은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함께 있지 않아도 마음을 전하는 딸,
한순간도 곁을 떠나지 않는 남편과 아들.
그들의 손끝에서, 눈빛에서,
저는 매일 사랑을 받습니다.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했을까.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숨을 쉴 수 있음에, 하루를 더 살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