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간의 정밀검사(PET/CT) 결과를 듣는 날, 그나마 ‘수술이라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마음 한편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료실 안에서 마주한 현실은 너무도 냉혹했습니다. 수술 불가, 난소와 뼈까지의 전이. 웃으며 버티던 마음은 그 순간 산산이 무너졌고, 딸을 서울로 돌려보낸 뒤 나는 결국 무너져 내렸습니다.
1. “그나마 수술이라도... 아니었나요?”
검사를 마친 후 며칠을 기다리며 내내 가졌던 마음.
그래, 암일지라도 그나마 수술이 가능하다면.
그 희망 하나로 버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5월 21일, 남편과 딸, 아들과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결과를 듣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수술이라도 가능하다고 해주세요.’
하지만 남편은 진료실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렇듯, 그는 여전히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진료실에 들어선 나는,
딸 곁에서 웃으며 앉았습니다.
어떻게든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나 선생님의 표정은 무거웠고,
결국 조용한 한숨과 함께 단호한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몸이 이런 지경인데도 아직 인지를 못하세요?”
“자궁내막암인데, 난소와 뼈까지 전이된 심각한 상태입니다.”
딸이 조심스레 수술 가능 여부를 묻자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서울 가도 늦고 하니, 그냥 이곳에서 빨리 치료라도 받으세요.”
그 순간, 내 마음속에 단 하나 남아있던
‘수술 가능성’이라는 희망은
산산이 부서져버렸습니다.
딸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고 대답했지만,
그 말이 얼마나 무겁고 쓴 지
서로 눈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 딸이 떠난 뒤, 웃음은 사라졌다
병원을 나오며, 딸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괜찮아, 엄마는 잘 이겨낼 수 있어.”
내가 딸을 안심시키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던 걸까요.
하지만 딸이 서울로 돌아간 그날 밤,
내 웃음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해왔던 내가
그제야 비로소 현실을 마주한 것 같았습니다.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주저앉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건
몸보다 먼저 무너지는 ‘마음’이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태연했습니다.
내가 주저앉아 있는 걸 보며
그저 무덤덤하게 “괜찮아?”라고 묻는 정도였습니다.
그의 반응은 때로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그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3.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존재
그때, 나를 붙잡아 준 건 아들이었습니다.
휴가를 내고 내려왔던 아들은
진료 결과를 들은 날 밤,
결국 회사에 휴직계를 내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엄마, 나 여기 있을게요.
병원 다니고 치료받는 동안 같이 있어줄게요.”
그 말 한마디에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터질 뻔했습니다.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웃어야 했던 시간들,
이제 조금은 내려놓아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아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마무리하며
희망이 산산이 깨졌습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을 주워 담아
나는 또 하루를 살아냅니다.
남편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딸은 조용히, 아들은 적극적으로 내 곁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제 곧 방사선과 항암치료가 시작됩니다.
앞으로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안 되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오늘도 글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