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정밀검사를 위해 입원을 권유받던 날, 저는 '산정특례' 대상자로 등록되었고, 아이들에게 제 병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제게 두 번째 진단처럼 느껴졌습니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고, 마침내 '암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습니다.
1. 산정특례 등록 환자
의사 선생님께서 제게 정밀검사를 권유하시며
조심스럽게 산정특례 등록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이제 산정특례 등록을 해야 합니다.
그 순간, 제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정지한 듯, 머릿속이 하얘졌고
심장 소리도, 눈물도, 생각도 멎어버렸습니다.
입을 열려고 해도 말이 안 나왔습니다.
그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그게... 뭔데요? 어떻게 하는 건데요?”
늘 혼자 진료실에 오는 저를 보며,
보호자가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셨는지
선생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직접 컴퓨터를 켜고 등록 절차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5월 9일 산정특례 등록 환자’가 되었고,
‘내가 정말 암 환자가 되었구나’ 하는 실감이
이때부터 조금씩 가슴 깊이 스며들며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입원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2. 아이들에게 말해야 할 때가 왔어요
입원 전 정밀검사를 받기로 하며,
저는 가장 먼저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아이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야 할 시간이 온 거죠.
그 시점에 두 남매는 모두 서울에 있었습니다.
아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딸은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죠.
그런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암이래’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먼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참 망설이다,
억지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들… 엄마가 암이래.
자궁내막암… 4기쯤 된대.”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들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내려갈게.
회사에 말하고 휴가 내볼게요.”
그 단단한 말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습니다.
덜컥 겁먹은 마음, 엄마를 지키고 싶은 마음.
떨리는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놓였습니다.
아들이 곁에 있어 준다는 그 사실 하나로요.
3. 딸아이의 씩씩한 위로
곧이어 딸에게도 전화를 걸었습니다.
딸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의젓하게 말했어요.
“우리 박여사는…
천하무적 오뚝이잖아. 엄마는 잘 이겨낼 거야.”
늘 밝은 목소리로 말하던 딸.
그날도 밝게 말했지만,
그 속에는 분명 떨림이 섞여 있었습니다.
엄마가 흔들릴까 봐 애써 씩씩하게 굴던 딸.
그 마음이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뒤,
두 남매는 곧 서로 통화하며
‘엄마 곁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를 상의했다고 하더군요.
딸은 학업 때문에 당장 내려오긴 어렵다며
“오빠가 먼저 내려가서 상황을 잘 보고 알려줘”라고 말했고,
아들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다음 날 아침 첫 차로 청주로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그 따뜻하고 믿음직한 아이들의 반응에
그날 밤 저는 모처럼 편안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놀라고 당황했을 텐데도
서로를 의지하며 결정하고 움직여 준 아이들이
참 대견하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내 곁엔 이 아이들이 있구나.
이 사랑만으로도, 나는 버틸 수 있겠다.
▪ 마무리하며
그렇게 나의 투병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남편의 무언의 위로,
그리고 스스로를 다잡는 이 순간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직 엄마이고,
아내이며,
한 사람의 ‘나’이기도 하니까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암에도, 봄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