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에 전이된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함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잘 걸을 수 있었던 지난날이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은 빠르게 무너졌고, 정신적으로도 버티기 어려운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도 서울에서 짐을 싸고 내려온 아들, 곁을 지켜주는 가족 덕분에 저는 다시 치료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1. 몸 위에 그려진 붉은 좌표, 낯설고 아픈 나의 모습
2025년 5월 22일, 방사선 치료를 위해 방사선종양학과에 방문했습니다.
치료 전 CT를 찍고 난 후, 제 몸에는 붉은 선들이 그려졌습니다.
방사선이 정확히 투사될 위치를 표시한 좌표.
"절대 지워지면 안 됩니다."
방사선사 선생님의 말에 긴장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거울 앞에 선 제 모습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나의 배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보라색 줄, 그 위로 나의 불안과 두려움이 겹쳐졌습니다.
5월 24일, 본격적인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며칠사이에 허리는 이미 70도 가까이 굽어 있었고, 고통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쳐 나온 저인데 걷는 것조차 혼자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병원을 다녀올 수있었고, 돌아오는 길엔
아무렇지 않게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알까요? 이렇게 걷는 것조차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2. 짐을 싸서 내려온 아들, 그 손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며칠 뒤, 5월 27일.
두번째 방사선 치료와 혈액종양내과 예약이 되어있어
아들의 손을 잡고 병원 가는 길,
다른 날보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두 번째 방사선 치료를 마친 뒤
허리가 조금 펴졌습니다.
진통제 덕분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들의 손을 잡고 있다는 그 사실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었는지도..
오랜만에 마음 한편에
‘혹시… 조금씩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스며들었습니다.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저는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든든한 아들 앞에서
‘절대 울지 말자. 강한 엄마로 보이자.’
3.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으며, 치료의 시작점에 서다
담담한 얼굴로 진료실에 들어선 나는,
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셔서 괜히 더 씩씩한 척 미소까지 지으며 인사드렸죠.
선생님께서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셨습니다.
하지만 내 CT 영상을 들여다보시던 그 표정은 이내 굳어졌습니다.
조심스럽게 아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수술은 가능한가요?”
선생님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 하나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했습니다.
“그럼... 저는 3개월은 살 수 있을까요?
아니면... 6개월 정도라도…”
아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다, 조용히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의료 기술이 많이 발전했어요.
함께 해봅시다.”
그 따뜻한 한마디가,
부서진 마음 한 켠을 살며시 붙들어주었습니다.
“함께 해봅시다.”
그 말 하나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6월 3일, 항암주사 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마무리
진료실을 나서려는 순간,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당부하셨습니다.
“혹시 다리에 마비 증상이 오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응급실로 오세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나섰지만,
아들과 저는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울면 안 되니까,
흔들리면 안 되니까…
이제 이 병은 ‘나만의 병’이 아니란 걸 실감했습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아파하게 되는 병이 된 거죠.
하지만,
그 아픔을 함께 견뎌낼 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저는 오늘 하루를 살아냅니다.
그리고 다음 치료를 향해, 또 한 걸음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