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 발걸음은 무겁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방해물 없는 곳을 찾아 걷는 것조차 조심스러운데,
문득 떠오른 곳이 딸이 다녔던 중앙여자중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한적한 운동장을 천천히 걷다 보니
공부가 싫다며 투정 부리던 중학생 딸의 모습,
그리고 말 한마디에 마음을 다잡고
진심으로 변해갔던 딸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 기억은 어느새,
저를 미소 짓게 만들었습니다.
1. 걸을 수 있어서, 이곳이 참 고마운 날
최근엔 오래 걷는 것이 힘들어졌어요.
돌부리나 턱에도 쉽게 발이 걸려 넘어질까 봐
늘 조심조심, 걷는 것도 망설이게 됩니다.
그런 저에게 학교 운동장은
참 고마운 공간입니다.
걸림도, 시선도 없는 곳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으며
오랜만에 숨을 고를 수 있었죠.
그리고 이곳은
제 딸이 매일 걸어 다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다리가 아닌 기억이 먼저 반응했는지,
운동장을 걷는 동안 채윤이의 중학교 시절이
조용히 제 안에서 피어올랐습니다.
2. "대성고는 힘들걸?" 그 말에 무안했던 엄마
중학교 2학년 채윤이는
공부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며 방황하던 시절이었어요.
“왜 공부해야 해요?”
그 물음 앞에 저는 자주 침묵했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봄,
가족 모임에서 작은아버지가 물으셨죠.
“고등학교 어디 가고 싶니?”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청주대성고등학교였습니다.
순간 분위기가 조용해졌고,
작은아버지는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거긴 공부 진짜 잘해야 가는 곳인데, 힘들지 않겠니?”
그 말에 저는 조금 무안했습니다.
그렇다고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정작 그날 이후 달라진 건 딸아이였습니다.
집에 오면 씻고는 곧장 책상 앞에 앉았고,
그 자리를 거의 떠나지 않았습니다.
책상 위엔 늘 높게 책들이 쌓여 있었고,
공부를 마친 과목의 책들은
하나둘씩 방바닥에 내려놓곤 했죠.
마치 책과 전투를 치르듯,
딸은 그날들을 전장의 군인처럼 살아냈습니다.
3. 눈으로 확인한 기적, 그래서 나는 믿어요
결과는 참 놀라웠습니다.
중3이라는 마지막 학년에 성적을 끌어올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도
평균 90점을 넘겼고,
국어는 반에서 1등까지 했습니다.
“혹시 커닝한 거 아냐?”라는 말도 들을 만큼
달라진 모습이 주변을 놀라게 했죠.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 모든 결과는
딸이 스스로 만들어낸 변화라는 걸요.
그리고 결국,
딸은 자신이 말한 그 학교,
청주대성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이 다짐했죠.
이 아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그저 믿어주자고요.
저는 이미 그 기적을
눈으로, 마음으로 확인했으니까요.
마무리하며
오늘 운동장에서 다시 만난 기억은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딸이 어떤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를 떠올리니
지금의 저를 다잡는 힘이 되어주었어요.
앞으로 딸이 어떤 길을 걷든
저는 믿고, 기다릴 겁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그 아이가 지나온 자리를
조용히, 천천히 함께 걸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