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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맞이한 일상, 그러나 여전한 마음의 소리

by 아토 (선물) 2025. 5. 2.

나와 함께한 뽈대


소변 주머니를 제거하고 일상으로 조금씩 돌아온 지금,
나는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를 새삼 느낍니다.
남편과 아들의 헌신적인 간병 속에 씻고, 먹고, 움직이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하지만 몸속의 암은 여전히 함께하며
내게 또 다른 준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마음속 깊이 빌어봅니다.
나의 마지막 모습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가 아닌 위로가 되기를.


1. 다시 욕실에서

소변 주머니를 제거한 날,
나는 다시 욕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벽 손잡이를 꼭 잡고 서 있는 나를
남편이 조심스럽게 씻겨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 보면 서글프지만
나는 그저 감사했습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샤워의 온기인지…
물이 몸을 타고 흐르고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감도는 이 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욕실 안에 서 있다는 것,
누군가의 도움으로 몸을 씻는다는 것,
그 모든 것이 감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일상 속에서 다시금
‘나’를 느끼는 일이구나.


2. 소변통을 든 사랑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양쪽 소변줄을 달고 있었습니다.
30분마다 소변이 담긴 주머니를
남편과 아들이 조심히 소변통에 받았습니다.

 

그들은 병원이 아닌 에서,
비위도 약한 사람들이,
그 소변통을 화장실로 들고 가 씻고
깨끗이 엎어두곤 했습니다.

 

식탁 옆에는 소변 주머니가 걸려 있었고
그 옆에서 함께 밥을 먹고 웃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나는 뽈대에 소변줄을 걸고 밀고 다녔고
그들은 단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저 ‘살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 같았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모든 순간이
눈물 나도록 고마운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그걸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내 곁에 24시간 붙어 있지 않아도 되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벅차게 감사합니다.


3. 마지막 얼굴

남편은 TV에서 죽음이 나오는 장면이 있으면
조용히 채널을 돌립니다.
지인의 부고를 들으면 아무 말 없이 집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래, 나도 언젠가는 떠나야 하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도 준비를 해야겠구나 싶습니다.

 

문제는…
나는 평소 사진을 정말 싫어해서
영정 사진으로 쓸 만한 사진이 없다는 것.
게다가 지금은 머리카락도 없고
눈썹도 속눈썹도 다 빠져 있는 얼굴입니다.
이 얼굴로 사진을 남긴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정 사진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라면,
나는 나의 마지막 표정을 준비해보고 싶었습니다.

핸드폰을 들고 내 얼굴을 찍어봅니다.
찡그린 얼굴,
미소 짓는 얼굴,
눈을 감은 얼굴.

 

고통스럽게 떠나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빌어봅니다.

 

제발, 나의 마지막 모습이
"더 살고 싶다"며 울부짖는 얼굴이 아니라,
마치 천국으로 떠나는 듯한
평온한 미소로 남겨지기를.

 

나의 마지막 표정을 연습해 본 오늘,
나는 또 한 걸음 삶과 죽음을 함께 껴안아봅니다.

마지막표정연습

 

마지막표정연습

 


마무리

누군가는 “소변주머니 뗐다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야?”
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겐 세상을 다시 품에 안은 일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손길로 씻고,
함께 식사하고,
카메라 앞에 웃는 얼굴을 남기려 애쓰는 이 하루.

 

그 속에 담긴 사랑, 회복, 준비,
그리고 나의 소망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소망합니다.
끝까지 인간답게,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이 길을 잘 걸어가기를.